9세 때 이웃에게 성폭행 뒤 21년 지나 가해자 살해...
아동 성폭력의 상처와 후유증 사회에 알려...
아동성범죄 가해자 절반은 아직도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있다.
검거된 살해 용의자 김OO 이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중..(갭쳐 여성신문)
1991년 8월 16일 전주지방법원 1호 법정에서 남성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30세 여성의 재판이 열렸다. 1심 세 번째 재판으로 검사의 구형을 앞두고 있었다.
재판장이 푸른 수의를 입은 이 여성에게 최후 진술을 하라고 재촉하자,
그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닌 짐승을 죽였습니다.”
이른바 ‘김OO 사건’은 아동 성폭력 피해자가 21년이 지나 가해자를 살해한 사건이다.
김OO씨는 9살 때 동네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이웃아저씨 송모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사건 직후 김OO씨는 피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말하면 가족들을 죽이겠다”는 가해자 송씨의 말에 겁에 질린 초등학생 아이는
말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상처에서 피가 나고 불안증세가 이어졌지만
아홉살 김씨가 할 수 있는 건 그 증세를 숨기는 것 뿐이었다.
김OO씨는 성폭행 피해를 입은 이후 20년 넘게 사건 트라우마로 정신적으로 고통받았다.
결혼생활 실패와 정신병원을 오가야 하는 자신의 무너진 삶이 과거 성폭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는 뒤늦게 자각한다. 그리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쯤 경찰을 찾았다.
하지만 경찰에게 들을 수 있는 말은 성폭력 범죄는 친고죄인데다 공소시효 만료로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말만 나올 뿐이었다.
크게 실망한 김씨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가해자 송씨를 욕하고 그에게 사과를 받는 일이었다.
하지만 송씨는 김씨의 오빠에게 합의금 명목으로 40만원을 내밀었을 뿐,
진심어린 사과 한 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1991년 1월 30일 김씨는 송씨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송씨가 “합의금도 줬는데 왜 이러느냐”고 욕설을 퍼붓자,
김씨는 송씨의 집을 찾아가 그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그리고 곧바로 현장에서 검거된다.
여성계 구명운동·후원 전개
성폭력 피해자가 법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가 공분했다. 특히 사건이 알려지고 그해 4월 사건이 발생한 전북지역에서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김OO 사건 대책위원회(위원장 박상희 목사)가 결성돼 구명운동과
후원활동이 전개됐다. 대책위는 특히 성폭력 피해에 관한 사회적 인식전환의 필요성과
성폭력관련 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활동에도 집중했다.
여성신문은 사건 직후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김씨를 면회하고 가족의 증언을 통해
성폭력 상처로 피폐해진 그의 상태부터 이후 집행유예로 풀려나 새 삶을 찾기까지
상세히 보도했다. 유년 성폭력의 후유증과 비극을 극명히 드러낸 김부남 사건은
발생 직후부터 집중 보도돼(1991년 8월 30일, 제138호), 그가 새 삶을 찾기까지 10여 회에
걸쳐 여성신문 지면에 상세히 담아냈다.
그해 8월 16일 검찰은 1심에서 김씨에게 5년을 구형했다.
당시 검사는 결심공판에서 “피고인이 성폭행자를 살해할 당시 인식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살인죄를 적용한다”며 이같이 구형했다. 그러면서 “피고인이 인식능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성폭행피해자로서 고통을 받아온 사실을 참작, 구형과 함께 치료감호조치를 병과한다”고
선고했다. 법원은 열흘 뒤인 8월 26일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그리고 치료감호처분 3년을 선고했다.
이날 방청석엔 김OO사건 대책위원회 소속 전북인권선교협의회 전북여성 의전화
전북대학교총여학생회 등 11개 단체회원 200여명이 참석, 재판을 지켜봤다.
이후 항소와 상고가 모두 기각되면서 김씨는 치료감호 기간을 마치고
93년 5월 1일 출소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이 일을 계기로 아동 성범죄에 관한 여러 입법들이 생겨났지만 아직도 미성년자 강간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피의자들의 48.3%는 여전히 집유로 풀려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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