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퍼거슨 일대기

레벨아이콘 파워에이드
조회 198 18.11.16 (금) 09:5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줄곧 우승을 노리던 잉글랜드 축구의 자존심이자 강팀이다. 물론, ‘맨유 역대 최고의 감독’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은퇴하기 전까진 말이다.

맨유를 세계 최고의 팀으로 만들어낸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 퍼거슨 감독의 맨유 부임 전 스토리
 
- 1941년 12월 31일,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태어난 퍼거슨은 고등학교 졸업 후 23세까지 클라이드 지역 조선소의 숙련공으로 일했고, 그 기간에 퀸스파크와 세인트 존스톤에서 선수로 뛰었다.
 
초창기에는 선수 생활이 잘 풀리지 않아 캐나다에 이민을 하려고 했으나, 동생의 여자친구와 감독의 도움으로 경기에 출장하게 되어 이민은 그만두었다.
 
1964년, 덤퍼린에 입단하며 공격수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하고 1974년에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1974년에 이스트 스털링에 본격적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1년 후에 세인트 미렌으로 옮겨 3년간 지휘봉을 잡았지만, 구단주와의 마찰로 인해 경질을 당한 후에 에버딘 FC의 감독을 맡으며 당시 스코틀랜드 리그 2강 체제를 이어가던 레인저스와 셀틱을 누르고 리그 우승을 차지, 그리고 1983년에는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하며 감독으로서 자질을 인정받았다.
 
당시 43세로 젊은 감독이고 자질을 인정받은 퍼거슨 감독은 버스비 감독이 은퇴 이후 과거의 영광을 찾지 못하고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것은 전설의 시작이었다.


# 퍼거슨 감독의 맨유 부임 후 스토리
 
- 퍼거슨 감독은 맨유에 부임할 당시, 맨유의 재정은 퍼거슨 감독의 연봉을 에버딘 감독 시절 때보다 낮은 연봉을 지급할 정도로 열악했고 선수 영입에 쓸 수 있는 자금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퍼거슨 감독이 맨유에 부임한 이유는 맨유 사랑이었다.
 
맨유에 부임한 퍼거슨 감독의 첫 번째 임무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철저한 재건 작업이었다. 부임 당시, 맨유는 리그에서 3~4위 정도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고 당시 권위 있던 FA컵 우승을 차지하는 등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이었지만 버스비 감독 시절에 데니스 로, 바비 찰튼, 조지 베스트 등 3명의 발롱도르를 배출하고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유러피언 컵을 들기도 했던 과거에 비하면 침체기라고 할 수 있었다.
 
술주정뱅이 구단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팀의 정신력은 형편없었고 지도력 있는 리더가 필요했던 맨유에게 퍼거슨 감독은 “난 축구 감독이지, 술집을 차린 게 아니야”라며 대대적인 재건을 공언했다.
 
그렇게 맨유의 새로운 감독이 된 퍼거슨 감독은 헤이젤 참사로 잉글랜드 리그 전체를 침체에 빠뜨린 리버풀을 끌어내리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팬들은 “과거의 영광을 다시 가져다줄 감독이야!”라며 치켜세웠다. 퍼거슨 감독은 팀 전체적인 부분을 관리하였고 그중 열정적으로 신경 썼던 것은 유소년 시스템이었다.
 
3시즌을 걸쳐 스티브 브루스, 개리 팔리스터, 폴 인스, 마크 휴즈, 마이크 펠란 등을 영입했으며 이 선수들은 퍼거슨 감독의 코치 아래 최고의 선수로 성장했다.
 
그리고 팀 분위기와 훈련 체계를 바꾸며 당시, 맨유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나 알코올 중독이었던 노먼 화이트사이드와 폴 맥그래스를 방출하며 본보기를 보여줬다. 또 다른 알코올 중독이었던 브라이언 롭슨은 퍼거슨 감독의 체제하에 많은 변화를 이끌어내며 맨유에서 핵심 멤버로 자리 잡았고 캡틴 마블이라는 별명으로 많은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퍼거슨 감독도 바로 좋은 성적으로 답하진 않았다. 부임 이후에 11위-2위-11위-13위-6위-2위를 기록했다. 이유는 화이트사이드, 맥그래스, 스트라칸 등 팬들에게 사랑받던 선수들을 과감히 보냈기 때문이다. 급기야 그다음 해인 1990년엔 성적이 하위권에 맴돌자 “퍼기 아웃(Fergie Out)!”이라는 구호가 올드 트래퍼드에 울려 퍼졌다. 퍼거슨 감독은 감독으로서 자질이 있었지만 구단의 재건에 과감한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성적이 들쑥날쑥했다.
 
그러한 퍼거슨 감독에게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준 것은 FA컵이었다. 퍼거슨의 맨유는 1989-1999 시즌에 FA컵을 우승을 차지하며 오랜 기간 우승에 목말랐던 팬들의 갈증을 일시적이나마 달래주게 되었다.
 
오랜 기간 관심을 기울였던 유소년 시스템은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었고, 각종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기에 당장 성적이 아닌 클럽의 발전을 놓고 퍼거슨 감독을 지지하는 팬들도 그리 적지 않았다.
 
그리고 1990-1991 시즌, FA컵 우승 팀 자격으로 출전한 UEFA 위너스 컵 결승전에서 마크 휴즈의 두 골에 힘입어 ‘토털 사커’ 크루이프 감독이 이끄는 FC 바르셀로나를 꺾고 팀에게 귀한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이는 리버풀의 서포터들이 일으킨 헤이젤 참사로 인해 5년간 유럽 무대 자격 정지로 인해 나가지 못했던 잉글랜드의 쾌거였으며 하나의 클럽의 우승이 아닌, 잉글랜드 전체를 대표하는 클럽으로서의 쾌거였다.


-> 잉글랜드 축구의 암흑기를 도래시킨 헤이젤 참사의 여파를 보여주는 리그 그래프 (29위 기록)


 퍼거슨 감독은 1986년에 맨유에 부임했는데, 이는 1985년 5월 29일 헤이젤 참사가 일어난 후였다. 헤이젤 참사로 인해 UEFA는 5년간 잉글랜드 리그 유럽 무대 출전 금지 처분을 내렸다. 10년까지 고려했던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10년 정지를 받았더라면 잉글랜드 리그의 랭킹은 29위에서 더 하락했을 것이다.
 
퍼거슨 감독은 쇠락해가던 맨유 유소년 팀을 다시 한번 축구천재들의 양성소로 바꿔놓은 동시에 마크 휴즈, 스티브 브루스, 피터 슈마이켈, 데니스 어윈 등 최고 수준의 성인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영입한 선수들 중 일부는 이미 능력을 인정받은 스타 선수였고 일부는 거의 알려진 바 없는 무명 선수였다. 그런 선수들을 자신의 철학으로 조합시킨 퍼거슨 감독은 맨유 감독 부임 5년 만에 팀은 물론, 리그를 유럽 대회 정상에 도전하는 리그로 탈바꿈시켰다.
 
퍼거슨 감독의 맨유는 그렇게 맞이한 1992년에 퍼거슨 감독이 만들어온 1군 팀과 지속해서 성장하고 있던 유소년 선수들 위에 화룡점정이 될만한 한 명의 스타가 맨유 유니폼을 입게 된다. 그 선수는 바로, ‘맨유의 왕’ 에릭 칸토나다.
 
위너스 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다음 시즌인 1992-1993 시즌, 감독과 불화를 겪게 된 칸토나를 라이벌 구단인 리즈 유나이티드에게 단돈 1M 파운드를 지급하며 영입했다. 이는 퍼거슨 감독 커리어 역사상 최고의 영입으로 기록된다.
 
칸토나는 맨유에 오기 전에도 프랑스 무대에서 많은 사건에 연루됐고, 리즈에서 뛴 짧은 시간에도 이미 많은 선수와 팀 내 불화를 겪고 있었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칸토나의 정신적인 측면을 억제하고 능력을 극대화했다.
 
칸토나의 합류로 맨유의 마지막 퍼즐을 맞춘 퍼거슨 감독은 EPL 출범 첫해였던 1992-1993 시즌, 자신이 맨유에 부임하면서 팬들과 약속했던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이는 잉글랜드 풋볼 리그가 헤이젤 참사, 힐스버러 참사 이후 리그 환경을 개편하고 새로 출범한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의 출범 원년 우승이기도 하다.


-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의 아이들 (왼쪽부터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게리 네빌, 필 네빌, 폴 스콜스)


 
그 후 1995-1996 시즌, 맨유는 칸토나가 쿵후 킥 사건으로 출장 정지를 당한 상태였고 팀의 주축이었던 인스, 휴즈, 칸첼스키스는 이적했다. 많은 핵심 멤버를 보낸 퍼거슨 감독은 어린 유소년 선수들을 중심으로 시즌을 치르기로 했지만, 개막전인 애스턴 빌라와의 경기에서 3:1로 패배하며 많은 언론들에게 질타를 받았다. 그중에 BBC 하이라이트의 고정 패널인 앨런 한센은 퍼거슨 감독에게 “꼬맹이들을 갖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우승할 수 없다”라며 퍼거슨 감독의 어린 선수 기용에 대해 혹평을 내렸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짜임새 있는 전술과 기용으로 좋은 경기력을 끌어올렸고, 결국 우승을 차지해 한센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1997-1998 시즌, 공격의 핵심이었던 칸토나가 은퇴를 선언했고 롭슨, 휴즈, 브루스 등 퍼거슨 감독이 부임 당시 좋은 경기력을 이끌어낸 스타들은 팀을 떠났다. 기존 칸토나, 휴즈, 맥클레어로 이뤄진 공격진은 콜, 요크, 셰링엄, 솔샤르로 대체되었고 브루스가 떠난 자리는 스탐이 맡게 되었다. 그리고 팀을 떠난 롭슨은 환상적인 경기력을 보이는 킨이 완벽 대체했다. 퍼거슨의 아이들인 긱스, 베컴, 스콜스, 버트, 네빌 형제는 어느덧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주축 선수가 되었고, 퍼거슨 감독은 퍼거슨의 아이들을 적극 기용했다.
 
그렇게 맞이한 1998-1999 시즌, 맨유는 긱스-스콜스-킨-베컴으로 이뤄지는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진과 당시 최고의 수비수로 평해 있던 스탐, 그리고 최고의 골키퍼로 평해 있던 슈마이켈이 만나 일명, 드림 팀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청소년 팀 출신으로 7명이나 되는 선수들이 팀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고, 맨유는 퍼거슨 감독의 훌륭한 지휘와 선수들의 뛰어난 기량하에 트레블을 달성했다.
 
특히,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캄프 누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라고 평 받는다.
 
뮌헨과의 경기 초반, 6분 만에 바슬러에게 실점하며 후반까지 경기력을 내주었고 팬들은 뮌헨의 우승을 점쳤다. 급기야 트로피에는 뮌헨의 리본이 감기고 있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물러서지 않고 쉐링엄, 솔샤르를 투입하고 슈마이켈을 공격적으로 내세우면서 반전을 노렸다.
 
그리고 후반 45분, 맨유가 코너킥 찬스를 잡았고 환상적인 킥을 구사하는 베컴은 긱스에게 공을 운반했다. 그리고 긱스는 치열한 수비 싸움을 하던 뮌헨의 수비진을 뚫고 슈팅을 날렸고 골문 근처에 있던 쉐링엄이 각도를 조절하는 슈팅을 연이어 날리며 후반 46분, 극적으로 동점 상황을 만들게 되었다. 다 잡아놓은 우승을 놓친 뮌헨의 선수들은 좌절했고, 반대로 맨유 팬들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맨유는 또 한 번의 골을 노리기 위해 총 공격을 다했고, 뮌헨 선수들은 갑작스러운 실점으로 인해 집중력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렇게 또 한번, 베컴에게 코너킥 찬스가 오고 날카롭게 크로스를 올렸다. 쉐링엄이 헤딩으로 공을 맞혔고 그 공은 솔샤르의 발 앞에 떨어졌다. ‘슈퍼 서브’ 솔샤르는 오른발에 정확히 공을 갖다 대며 득점하게 된다. 경기는 그렇게 환상적인 역전극으로 2:1의 점수로 마치게 되었고 맨유는 유럽 역사상 4번째의 트레블을 달성하게 되었다.
 
맨유가 트레블을 기록하자 모든 언론은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5년간 유럽 대회를 모두 정지당한 리그에서 이런 짧은 시간에 트레블을 달성하는지 … 한 클럽이 5년간 유럽 대회를 나가지 못해도 침체기에 빠지는데 헤이젤 참사로 인해 잉글랜드 전체 클럽이 유럽 대회를 못 나갔던 잉글랜드 리그 상황으로 인해 더 큰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 헤이젤 참사 여파로 팀의 용병들은 모두 영국 리그를 떠났고, UEFA 리그 랭킹 3위를 기록하던 잉글랜드 리그는 한순간에 29위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퍼거슨 감독은 팬들과 했던 약속대로 잉글랜드 리그를 다시 구해냈고, 그로 인해 잉글랜드 국민은 다시 한번 감동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2세는 당시 트레블을 기록 직후 “맨유가 들어 올린 것은 트로피가 아니라 영국의 자존심이었다”라고 퍼거슨 감독을 치켜세웠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트레블을 달성한 다음 날, 영국은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베스트가 축구계를 떠난 후 두 번째로 일어난 휴교령이었다. 이 공적으로 퍼거슨 감독은 기사 작위를 받아 알렉스 퍼거슨 경 (Sir. Alex Ferguson)이 되었다.

-> 트레블 당시 퍼거슨 감독 (프리미어리그, FA컵, 챔피언스리그 트로피)

그리고 퍼거슨 감독은 트레블 직후 유럽 대형 클럽들의 러브콜을 받은 주장인 킨을 잔류시키며 팀의 중심을 잡는데 성공하였고 두 시즌 연속해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해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최초로 한 팀을 이끌고 3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한 감독이 되었다. 퍼거슨 감독은 말 그대로 기록 제조기였다.
 
퍼거슨 감독은 트레블 직후 “4-4-2 포메이션의 시대는 끝났다”라며 팀의 전술적인 개편과 재건을 예고했다. 이에 세바스티안 베론, 에릭 젬바젬바 등 월드클래스 선수를 영입했지만 실패 속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뛰어난 개인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맨유의 강한 색깔에 녹아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3-2004 시즌, 2004-2005 시즌, 2005-2006 시즌 총 3시즌 동안 맨유는 과감히 재건하며 또 한 번의 암흑기가 찾아왔다.
 
2003-2004 시즌, 당시 맨유는 ‘포르투갈의 기대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영입하고 3위 기록, 2004-2005 시즌, 에버튼의 ‘제2의 시어러’ 웨인 루니를 영입하고 3위 기록, 2005-2006 시즌, 2위를 기록했다. 놀랍게도 이 성적이 맨유의 암흑기였다.
 
당시 퍼거슨 감독은 너무 어린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경험 부족으로 인한 패배로 성적이 들쑥날쑥했고 결국 10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예선 탈락, EPL 출범 이후 리그 우승을 3년 연속 놓치게 된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러한 암흑기에도 퍼거슨 감독은 결코 3위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과감한 재건을 단행하며 찾아온 과도기 속에서도 맨유는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상위권을 유지하며 클럽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클럽이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선수단을 확실하게 장악하며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지도력을 발휘한 퍼거슨 감독이 있기에 가능했다.
 
라이벌인 아르센 벵거 감독의 아스날이 2003-2004 시즌, 프레스턴 FC 이후 114년 만에 무패 우승을 차지하게 되고 러시아 석유 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인수된 첼시는 유명 선수들을 영입하고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한 포르투의 주제 무리뉴 감독을 선임하면서 달라진 첼시를 보여주며 맨유와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퍼거슨 감독은 ‘세르비아 최고의 수비수’ 네마냐 비디치, ‘에인세의 백업’ 파트리스 에브라, ‘두 개의 심장’ 박지성, 맨유 역대 골키퍼가 된 에드윈 반 데 사르를 영입하며 팀을 다시 정상으로 끌어올릴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맞이한 2006-2007 시즌에서 리그 우승을 이끌며 부활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고 2007-2008 시즌에는 호날두를 앞세워 챔피언스리그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이뤄냈다.
 
그 후에 2008-2009 시즌에도 좋은 기세를 이어가, 쿼트러블을 노렸으나 선수들의 체력적인 문제로 리그 우승, 칼링컵 우승, 클럽 월드컵 우승,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달성했다. 이 우승으로 인해 라이벌 리버풀의 리그 우승 기록과 동률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20년 전, 맨유의 팬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현실로 이룬 것이다.
 
2009-2010 시즌엔 긱스와 스콜스 등 퍼거슨 아이들의 노쇠화와 함께 당시 최고 이적료를 기록하며 영입한 ‘백작’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의 부진과 에이스였던 호날두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으로 칼링컵 우승에 그쳤다.
 
그리고 오랜 시간 맨유와 함께한 퍼거슨 감독의 심장이 점점 나빠지고 건강에 문제를 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2010-2011 시즌까지만 감독직을 수행하고 그 이후에 은퇴할 것이라는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에 데이비드 길 단장은 “퍼거슨 감독의 생각에 따르겠다, 은퇴를 결정할 것이면 은퇴를 하고, 아니면 후임자를 정해주고 가라”라며 퍼거슨 감독에게 알렸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맨유 감독직을 이어갔고 새로운 시즌인 2010-2011 시즌을 맞이하게 된다.
 
야심 차게 영입한 ‘멕시코 스타’ 치차리토가 대박을 터트리며 순항했지만, 점점 무승부가 많아졌고 한 번도 패가 없었던 맨유는 첼시, 아스날, 맨체스터 시티와 우승 경쟁을 이어갔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루니의 이적 선언으로 팀 분위기는 나빠져만 갔고 25R까지 리그 31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퍼디난드의 부상으로 인한 수비 불안으로 꼴찌 팀이었던 울브스에게 1:2 역전패하며 무패 행진을 아쉽게 마감했다.
 
하지만 뛰어난 선수단 장악력으로 퍼거슨 감독은 승리를 이어갔고, 승점 80점을 기록하면서 9점 차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맨유는 이로써 리버풀의 최다 우승 기록을 경신하였고 퍼거슨 감독의 부임 당시 약속했던 “헤이젤 참사로 리그 전체에게 민폐를 끼친 리버풀을 끌어내리겠다”라는 말을 지키게 되었다.
 
아쉽게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악연이었던 바르셀로나를 만나면서 3:1로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 이러한 위대한 기록을 이어간 퍼거슨 감독은 어느새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경기 운영 및 선수 영입 등의 문제를 포함해 거의 모든 전권을 가진 감독으로, 정확히는 감독이라기보단 매니저로 봐야 한다는 말이 많다. 한마디로 축구계의 감독이란 것이다.
 
그 후 2011-2012 시즌, 맨체스터 더비 이후에 퍼거슨 감독은 경기에서 패배한 선수들에게 헤어드라이어 모드로 변신했고 경기 종료 후, 선수들에게 “빌어먹을 멍청이들아”부터 시작해서 갖은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다. 칼링컵 16강전인 3부 리그 소속인 올더숏과의 경기에서 분위기 전환을 위해 맨체스터 시티와의 더비에 출전했던 선수들은 한 명도 포함하지 않았다.
 
결과는 3:0, 맨유의 승리였다. 이러한 확실하고 단결한 운영방식이 선수들을 자극했고, 퍼거슨 감독이 최고의 감독이 된 이유다.
 
그리고 11R 선더랜드와의 경기가 있던 날, 퍼거슨 감독의 맨유 감독 취임 25주년을 맞아 구단주로부터 올드 트래퍼드의 가장 큰 스탠드인 북쪽 스탠드의 이름을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로 명명하는 것을 선물 받았다. 스탠드가 개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은 올드 트래퍼드의 101년 역사상 처음이다. 그리고 스탠드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경기장에 세워질 퍼거슨 감독의 동상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12월 31일, 퍼거슨 감독의 70번째 생일에 블랙번과의 경기에서 2:3으로 패하며 최악의 선물을 받았고 리그 우승 가능성이 멀어졌지만 2012년 들어 능력을 극대화하며 맨체스터 시티를 제치고 리그 1위를 차지했다. 대부분의 축구 전문가와 팬들은 맨유의 상승세 이유를 바로 퍼거슨 감독의 존재라고 설명하며 극찬했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 못 한 맨유의 후반 부진이 찾아왔고 라이벌인 맨체스터 시티는 연승 행진을 이어가며 유력했던 리그 우승이 멀어져 갔고 36R, 마지막 경기에서 강등권 탈출을 위하여 모든 걸 쏟는 Q.P.R 상대로 끌려가다 믿기지 않는 3:2 대역전극을 펼치며 맨유는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준우승을 기록했다.

-> 맨체스터 시티의 극적 우승 후 아쉬워하는 퍼거슨 감독

2012-2013 시즌, 퍼거슨 감독은 반전을 노렸고, ‘라이벌의 월드클래스 공격수’ 로빈 반 페르시, ‘도르트문트의 테크니션’ 카가와 신지가 영입되었다. 하지만 부실한 중앙 미드필더 탓에 언론은 “이번에도 퍼거슨 감독의 맨유는 우승을 차지하지 못할 거야”라며 퍼거슨 감독의 기량을 의심했다. 하지만 맨유는 34R, 애스턴 빌라전에서 우승을 확정시키며 맨유의 20번째 리그 우승이자 퍼거슨 감독의 맨유에서의 13번 우승을 이끌어냈다.



 
# 퍼거슨 감독의 은퇴 스토리
 
그 후에 많은 은퇴 루머가 잦았던 퍼거슨 감독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찾아왔고 결국, 퍼거슨 감독은 2012-2013 시즌 끝으로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당시 맨유의 골키퍼 코치였던 에릭 스틸은 퍼거슨 감독의 은퇴 후에 이야기를 전했다.


“2013년 5월 7일, 퍼거슨 감독의 은퇴 계획이 알려진 날에 팀 스태프와 선수들이 함께 골프를 치러 갔어요.

게임을 마치고 라운지로 올라갔더니, 모두의 휴대전화가 테이블 위에서 울려 더군요. 스콜스, 캐릭, 긱스가 올려둔 휴대전화가 동시에 울리는 모습은 장관이었어요. 퍼거슨 감독님의 은퇴 계획이 알려진 순간이었죠.

아무것도 모르던 데이비드 길 사장님은 당시 골프를 치던 와중이었는데 모든 사람들은 질문했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요?”하면서요.

퍼거슨 감독님은 그다음 날, 아침에 나타나서 “나 은퇴해”라고 얘기했어요. 그제야 확실하게 되었죠.

당시 감독님은 아침 7시에 저를 비롯해 마이크 펠란 수석코치, 르네 뮬레스텐 1군 코치를 사무실에 호출했어요. 정말 감정적인 순간이었죠. 그리고 나서는 다른 모든 스태프에게 은퇴 계획을 알렸고, 선수들에게도 알렸어요”
“퍼거슨 감독님이 2012-2013 시즌, 리그 우승을 확정시킨 뒤에 기념 버스 행진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어요.

퍼거슨 감독님이 트레블을 달성했을 때보다 더 대단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은 공사를 위해 설치한 비계까지도 매달려 있었죠”



-> 퍼거슨 감독이 2012-2013 시즌, 리그 우승을 확정시킨 뒤에 기념 버스 행진

그리고 퍼거슨 감독이 은퇴 후에, ‘영국 언론지’ 더 선은 퍼거슨 감독의 별명인 헤어드라이어답게 헤어드라이기 모양의 케이크를 선물했다.

-> ‘영국 언론지’ 더 선이 퍼거슨 감독에게 선물한 헤어드라이기 모양의 케이크

 그리고 퍼거슨 감독은 또 한 번의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은퇴식을 거행했다.
 

-> 많은 지지를 해준 올드 트래퍼드의 맨유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퍼거슨 감독
 
퍼거슨 감독은 은퇴 연설을 하면서 이러한 말을 남겼다.
 

“미리 대본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얘기할게요.

그리고 맨유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것만 얘기할 수 있다면 만족합니다. 난 정말 운이 좋았어요.

맨유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영국 역대 최고의 선수들을 지도할 수 있었으니까요. 오늘 여기 있는 이 선수들은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맨유를 빛내왔습니다.

환상적인 방식으로 리그를 제패했죠. 선수들, 모두 수고했습니다. 은퇴가 맨유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제 경기를 보면서 고통을 받기보다 더 즐길 수 있겠죠.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막판에 기록한 득점, 극적인 승부, 심지어 패배의 순간조차 그 모든 것이 우리, 바로 이 위대한 클럽의 일부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믿기지 않는 경험이었죠. 그 점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또 전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힘든 시기를 맞이할 때 맨유의 코치 진 모두, 선수들까지도 내 곁을 변함없이 지켰다는 겁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할 일은 우리의 새 감독을 끝까지 지지하는 거예요. 그게 중요합니다. 감정이 차오르기 전에, 일단 오늘 은퇴하는 스콜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네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선수였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맨유 최고의 선수로 기억될 것입니다. 폴! 우리 모두 네가 편안하게 은퇴하길 바란다.

물론 네 녀석이 어디 안 가고 앞으로도 내 주위에 머물며 날 귀찮게 하리란 걸 알고 있어. 아울러 플레처도 건강을 회복해 빨리 맨유로 복귀하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아 … 앞으로도 모든 성공을 거머쥐길 기원한다. 난 너희들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고 있어.

너희들이 입고 있는 맨유 유니폼이 여기 모여있는 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희 스스로 잘 알 거야. 그러니 절대 실망하게 하지 말아라.

너희들은 부담감을 기꺼이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전 이제 집으로 돌아갈 거고, 한동안 집에 머물 겁니다.

다시 한번 우리 퍼거슨 가족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우리 손주 녀석들 11명이 저기 다 있네요, 사랑한다 얘들아! 감사합니다”


맨유의 감독이기 전에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며, 할아버지인 퍼거슨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은퇴식이었다.

이로써 퍼거슨의 맨유에서의 감독 인생은 13번의 리그 우승, 2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포함한 27년간의 화려한 장기집권으로 마무리되었다. 


댓글 작성 (0/1000)

비밀글 (체크하시면 운영자와 글 작성자만 볼 수 있습니다)

0개의 댓글과 0답글이 있습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